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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25

아들이 빌려온 비디오

조회 수 1661 추천 수 2 2006.03.17 09:49:26


아빠는 일도 많고 친구도 많았습니다. 늘 바쁘고 시간도 없었지요. 그래서 저녁 식사는 거의

엄마와 나 둘만의 조촐한 자리였고, 가끔의 나들이도 엄마와 나 둘뿐이어서 아빠와 마추지면 낯선

아저씨처럼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하루 종일 아빠와 함께 있어야 하다니요.

피하고 싶은 친구와 짝꿍이 되었을 때처럼 아주 거북한 기분이었습니다.



바쁘기만 하던 아빠를 집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은 꽤 여러 날 전입니다. 그 후부터 아빠

엄마의 말다툼이 잦아지더니 어젯밤에 엄마는 큰 결심을 한 듯했습니다.



"당신, 일도 없이 나가는 거 경비도 많이 들고 괴로운 일이라는 거 잘 알아요. 마침 내가 할 만한

일이 있다니 내일부터 나가겠어요. 진수가 봄방학을 해 걱정도 덜 되고요. 그 동안 부자지간에

서먹했던 것도 풀고 잘 지내 보아요."



엄마가 나가고 아빠와 둘이 남게 되자 가슴이 꽉 막혔습니다. 커다란 벽이 눈앞을 가로막은 것

처럼 답답했습니다. 아빠는 아까부터 신문만 보고 있습니다. 나도 책을 펴 들었지만 눈이 자꾸

문쪽으로 갔습니다. 차라리 아빠가 나가기라도 했으면 싶었습니다.



'그 많던 아빠 친구들은 뭐 하는 거야. 이럴 땐 전화도 안 하고.'



괜히 아빠 친구에게까지 부아가 났습니다. 화장실 가는 척 슬며시 나가 보니 구부려 앉아 신문만

내려다보는 아빠의 뒷모습이 친구가 없어 쪼그리고 환자 노는 아이처럼 쓸쓸하고 안돼

보였습니다.



'잘못 걸린 전화라도 왔으면......'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요. 그때 전화벨이 유난히 크게 울렸습니다. 기다렸던 것처럼 벨이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아빠가 급히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아...그래 기다려라."



반가움에 찼던 아빠 목소리가 잦아들어 갔습니다. 내 친구의 전화였습니다. 친구는 아빠 목소리에

놀라 "너희 아빠 왜 회사에 안 갔냐?" 회사에서 잘렸냐?"고 물었습니다.



"임마, 잘리긴 뭐가 잘려. 우리 아빠가 무슨도마뱀 꼬리인 줄 알아, 잘리게."



화가 나 꽝 소리나게 수화기를 내려놓는데도 아빠는 여전히 신문만 내려다봅니다. 아빠의 모습이

점점 오그라드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습니다.



'신문을 다 외우시려나, 원. 아빠한테 무슨 재미있는 일 없을까?"



문득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두툼한 오백 원짜리 동전 한 개와 백 원짜리 동전 여섯 개가 들어있는

호주머니를 털어 단숨에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숨이 턱에 찬 걸 보니 새로 나온 만화 영화 소식을 듣고 왔구나. 오늘 아침에 나온 거야, 아주

아슬아슬하고 신나는 모험 이야기지."



"새로 나온 만화 영화가 있다고요?"



갑자기 마음이 막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힘껏 저었습니다.



"저-저, 그게 아니고요. 어른이 좋아하는 비디오 한 편 골라주세요. 무지 재미있는 걸로요."



좋아할 아빠를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싱글벙글 웃음을 날리며 집에 들어가니

아빠는 우두커니 베란다에 서 있었습니다.



뜻 맞는 아이에게 지우개 한 번 먼저 빌려 줘서 단짝이 되었던 것처럼 내 작은 정성 한 번으로

아빠와 나는 많이 친해진 것 같았습니다. 점심엔 이마를 맞대고 라면을 먹기도 했으니까요. 한참

먹다가 이마를 부딪혀 고개를 들면 아빠 눈에도 내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나는 너무

뜨겁고 매워서 눈물이 나왔는데 아빠는 왜 그랬을까요?



비디오도 아빠와 나란히 앉아 같이 보았습니다. 우습지 않은데 마구 웃어대는 어른 비디오는

하나도 재미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기분이 나아 보여 다행이었습니다. 주인공 남자와 여자가

뽀뽀하는 장면이 나오면 '어허 이건 엄마랑 봐야 하는 건데' 하며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리고

농담도 했으니까요. 내 눈을 가린 커다란 손, 갑자기 그 손을 꽉 잡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오늘 고생했을 텐데 우리가 밋있는 저녁을 만들어 놓자. 엄마가 뭐 좋아하지?"



저녁 메뉴는 동태 매운탕으로 정했습니다. 아빠가 낚시터에서 익힌 솜씨를 발휘한다고 했지요.

맛은 몰라도 냄새는 근사했습니다.



엄마가 오고 정말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피곤함도 모른 채 엄마는 참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무언가 부드럽고 달콤한 기운이 우리 집 가득 차 오르는 듯해 나는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른 느낌이었습니다.



"여보 고마워요. 그런데 당신, 어떻게 이럴게 많이 달라졌지요?"



"비디오 덕분이지.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비디오였어."



"제목이 뭔데요? 내용은요?"



놀란 엄마가 거푸 물었습니다.



"'아빠와 아들' 아니 '아들과 아빠'. 절망한 한 아빠가 아래로 콱 떨어져 버리고 싶은 참담한

심정으로 베란다에 서 있는데, 그 아래로 아빠에게 보여 줄 비디오를 가슴에 안고 좋아 어쩔 줄

모르고 달려가는 아들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맨 마지막에 아빠는 그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야겠다는 용기를 갖게 돼. 아들이 가져다 준 건 비디오가

아니라 가슴 가득한 봄볕이었는지 몰라. 아니면 희망이었는지도, 사랑이었는지도. 시리기만 했던

아빠 가슴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나기 시작했으니까."



"어-어, 내가 빌려 온 비디오는 그런 거 아니었는데..."



그날 밤 걷어 차낸 이불을 엄마가 아닌 아빠가 덮어 주는 걸 잠결에도 다 알 수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내 머리를 쓸어 준 건 아빠의 커다란 손이었으니까요.


  


  


조회수 : 12248


글쓴이 :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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