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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롤 압박(?) 2차 대전 분석. 여러가지가 껴있다.

조회 수 976 추천 수 0 2007.02.22 09:16:55
2차전쟁기념사 URL 복사하기 - 


1. 진주만.

일본이 진주만 기습하려는 계획은 이미 전쟁전에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해군제독 야마모토 이소로꾸는 진주만 기습 계획이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반대하는 참모들을 해임한다는 강경한 자세로 이 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졌다고합니다.

이 계획이 채택된 것은 1941년 3월이었습니다

또한 1941년 11월 3일 나가노 해군 군령부 총장은 진주만 기습의 실시를 결재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부대는 11월초 구레 군항에 집결,

10일부터 18일까지 에트로프섬 히트카프만을 향해 출항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본 이호 잠수함 30척이 선발대로 하와이 해역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기습부대가 공격하기 전에 진주만의 정세를 정찰하는 것과 공습이

시작되면 나타날지 모르는 미국함대를 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중의 5척은 소형 잠수함을 등에 업고 있었는데

이들은 2인승 잠수함으로 어뢰 두발을 장비하고

적함에 몰래 다가가 기습하기 위한 특수 잠함정이었습니다.



『미국에 노획된 일본 소형 잠수정』

암호명 なぃだか ゃま のぼゎ

2월 1일 기습부대(이하 기동부대라 칭함)의 최고 지휘관 나구모 중장에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대장에게서

    なぃだか ゃま のぼゎ 『해석:니이다까 산에 오르라』는 암호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개전은 8일 예정대로 공격하라는 뜻입니다.

기동부대는 두 줄로 늘어선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히트카프만을 나섰습니다.

이 기동부대는 북위 45도, 동경 159도 30분 지점에서 바로 동으로 침로를 잡았다고합니다.

또한 12월 3일에는 동경 170도 지점에서 해상급유를 받았습니다.

이 기동부대는 6일 이전에 타국에게 발견되면 임무를 버리고 돌아오라고 되있었으나

나쁜 날씨와 안개 덕에 이들은 일본의 어선 한척을 만났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선 관제를 하며 12월 4일 저녁무렵

미드웨이 북방 9백 해리 지점에 이르렀고 다시 침로를 바꾸었습니다.

또한 7일 아침에는 도쿄의 작전본부에서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함대의 군함과 위치가 자세히 타전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일본 기동부대의 전 군함은 26노트로 속도를 높이고

진주만 북방 275해리, 북위 26도 서경 158도의 비행 발진점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이 기습에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면 일본의 공격징조가 이미 미국에 의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기동부대와 함께 출항해 먼저

진주만으로 향한 일본 잠수함대가 미국에 의해 발각된 것이습니다.

7일밤 잠수함대는 진주만을 향하여 특수 잠함정을 발진시켰습니다.

이들 중 한 대가 8일 03:40분에 미군 소해정인 콘들에 발견되었고

이 연락은 받은 구축함 워드가 폭뢰공격을 가한 것이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06:40분이 되어서야 진주만의 본부에 보고를 하게 된다고합니다.

그때는 이미 일본의 폭격기들이 기동부대를 떠났을 때였습니다.



『영화 진주만의한 장면』

  

『일본군 비행기출격모습』

고요히 잠들어있는 진주만

일본기동부대는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8일 오전 06:00에 폭격기들을 발진시켰습니다.

1차 공격부대인 전투기 43대, 뇌격기40대, 급강하폭격기 51대, 대형 폭격기 41대가 발진한 것이습니다.

※실제별명을쓸려고했으나 모르시는분들이있을 것같아 그냥명칭으로적었습니다.[변명아님 ㅡ ㅡ;]

이 공격부대는 짙은 구름 덕에 목표를 찾는데

고생했으나 07:50분 이들은 하와이 상공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폭격대형으로 흩어지고 각 목표로 향할 때까지도

진주만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기습부대에게 단 하나의 장애로 남아있던

날씨마저 공격시작과 맞추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진주만 항내의 미국 전함들에게 먼저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뇌격기가 편대를 풀고 일제히 뇌격 침로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습니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이들 뇌격기들은

군함에 최대한 접근하여 200-300m 지점에 어뢰를 투하 하기시작했습니다.



『폭탄맞은 미국의 전함』

작전성공

이들 어뢰가 명중하고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무전을 일본 지휘관기가 송신할 때까지도 미국의 반격은 전혀 없었습니다.

소총 한발조차 발사되지 않은 것이었다고합니다.

공격시작에서 불과 3,4분이 지날 동안 미국의 주력함은

모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었다고합니다.

미국의 군함들이 뇌격기의 제물이 되고 있을 때

하와이에 있던 히컴육군비행장, 카네오네 해군비행장

을비롯한 두 개의 공군기지가 일본 급강하폭격기와 전투기의 공습을 받고 있었습니다.

단 한 대의 반격기도 띄우지 못한 채 이들 항공기지는 차례로 불길에 휩싸이며

줄줄이 늘어선 미국의 전투기들은 일본 공격대의 절호의 목표가 되어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 1차 공격대가 공격을 거의 끝마칠 무렵에야 비로소 지상의 대공포대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공격받은 카네오네 해군비행장』



『일본 "제로기"에서찍은 진주만의 모습』

다시깨어난 진주만..

이제서야 진주만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1차 공격대는 그 대공포화에도 자신들의 목표를 향해 계속 공격을 가하고

2차 공격대가 발진했다는 무전을 받은 후에야 항공모함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1차 공격대의 손실은 전투기 3, 급강하폭격기 1, 뇌격기 5 으로

미국에 비하여 아주 경미했습니다.

일본 기동부대의 기함 아까기에서는 일본기의 전과 보고와 함께

미국 하와이 방송의 미친 듯한 방송이 들어왔다고합니다....

- 연습이 아니다. 진짜 공습이다 -

일본 2차 공격대가 08:15분에 진주만 상공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전함 4척은 기라앉고 있었고, 3척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2차 공격대는 유일하게 상처를 입지 않은 전함 캘리포니아에 쇄도했습니다.



『공격받은 애리조나호』

또한 다른 편대는 육상의 항공기지들을 다시 습격하여 반격을 위해 날아 오를 준비를 하던

미국 항공기들에게 다시 한번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폭격대는 이미 날아올라 대기하던

미 육군 전투기 P-40 2대의 반격을 받아 다수의 급강하폭격기가 격추된습니다.

그러나 이 용감한 미 육군 전투기대는

개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일본 제로기와 공중전을 벌여 모두 격추되고말았습니다.

일본 제로기가 처음으로 그 뛰어난 성능을 보인 것이습니다.

이 2차 공격대가 돌아설 무렵에는 이미 진주만에 목표다운 목표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공포화와 미국 전투기들의 반격으로 전투기 6, 급강하폭격기 14기 를 잃었다고합니다.



『폭격받는 진주만의모습』



이들 2차 공격부대의 수용을 마친 일본 기동부대는 방향을 북서로 돌려

하와이와 미드웨이에서 날아올 미국 폭격기들의 공격권에서 재빨리 벗어났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일본 특수잠함정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모두 격침되었습니다.

한대는 소해정의 폭뢰공격으로 인해, 2대는 구축함의 공격으로,

또 한 대는 경순양함의 공격으로 격침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한 대는 도망쳤지만

해류에 밀려 야프 섬 해안에 올라앉고 말았습니다.

기절해 있던 함장 사께마끼소위 는 태평양전쟁 포로 제1호가 되고말았습니다..

    

   『일본 특수잠함정에 관한 사이트 바로가기』

8일 오후 1시 일본 해군부의 전과 발표가 있었다.  * ( )안의 숫자는 미군측 발표

    -전과-

  격침 - 전함 5척, 급유선 1척

  대파 - 전함 3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중파 - 전함 1척, 경순양함 4(1)척

          항공기 - 464(352)기 이상  

     격납고 - 8동 파괴

     피해

               항공기 29기    특수잠함정 5척

이렇듯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기습은 일본의 선전포고

이전에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은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는 미국의 적개심을 자극하여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소극적인 대처에서 적극적인 대처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겨우 반년 뒤 미국의 대 반격은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2. 101 공수부대

미 101 공수사단의 개요 및 창설



101공수사단은 1942년 루이지아나의 Claiborne캠프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전신인


101보병사단은 원래 1918년 7월 23일에 창설되어 1차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었다. 급조된 보병


사단이라, 무기나 장비 병력등이 충분하게 가동되지 못했었다.


전시를 위한 임시편성의 부대였기 때문에 1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사단은 해체되었다.

1921년 지역방위개념의 대두로 '101 보병사단'이 재창설되었고 사단사령부는 밀워키에 위치했습니다.
예비 군 개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실제병력이 없는 'Paper Army'였습니다. (서류상으로만 부대원이
등록되어 있고 전시에 예비군을 소집하는 형식의 지금의 주방위군이나 예비군사단의 개념)





공수사단의 창설



공수사단이란?

당시에는 비행기의 항공능력도 떨어지고, 항공기당 병력수송도 10~20여명 정도에 불과하여, 후방
침투후 교란작전을 기초로 하는 '특수전'의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2차대전당시 공수사단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특전사와 같은 특수부대와는 개념이 다른 '정규전 부대'였습니다.

(전 특전사 출신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미 101공수와 특전사를 비교하는 건 자존심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특전사가 장비면에서 열악한 부분이 있겠지만 이들보다는 전투능력이 뛰어날 것입니다.
그린베레라면 또 모르겠네요..그린베레는 미 육군에서도 일정기간 이상 복무한 자에게만 응시기회를
주고, 일정기간 테스트를 거친 병력들만 요원으로 선발합니다. 즉 101공수사단 소속 장병들도
그린베레에 지원하려면 별도의 테스트를 거쳐야만 하고 지원률대비 합격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합니다. 미국내 전사연구가들도 이들을 Special Force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즉 부대이동을 비행기를 이용하여 낙하산으로 이동하는 것이외에는 전형적인 공격,방어등의 정규
보병사단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 여담시리즈1-

『밴드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부대작전들도 2편에 포진지 급습
외에는 일반 정규전이었던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임.』
(한국의 특전사와 미군부대중 하나를 비교하라면 월남전때 창설된 그린베레가 비교적 근접한
개념의 부대입니다. )




이들 공수사단이 특수부대와 다른 차이점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하면

1) 정규전을 수행 (전선과 무관한 비선형 전투, 게릴라전이 아닌, 전선을 형성하여 전형적인 방어,


공격의 전선형 전투 수행)

2) 소수병력이 아닌 사단병력 (포병, 지원부대를 포함)이 전선에 투입됨.



101공수부대의 창설




미군의 공수사단은 1940년 미육군내에서 최초로 낙하산병들에 대해 일련의 시험을 거치면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포트베닝에서의 성공적인 테스트에 고무된 미육군은 대규모 부대의


공수작전이 가능한 병력의 창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독일에는 파슈름야거와 같은 공수사단이, 영국에는 레드데블스

(Red Devils, 붉은 악마 라는 명칭이 이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와 같은 영국공수사단들이 전장에서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여담시리즈2-

세계 최초의 특수부대인 영국의 SAS와 코만도가 창설된 것도 2차대전 때입니다.


미국은 이에 자극을 받아 레인져 연대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다른나라의 공수부대를 기초로 미 육군성은

2차대전 발발과 동시에 2개의 공수사단을 창설했습니다.


81보병사단을 공수사단으로 임무를 변경하여 제82공수사단 으로 재편성하였고

역시 101보병사단도 101공수사단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후에 11,13, 17,18, 21의 5개 공수사단이 창설되었으나,

대부분 2차대전말에 투입되어 일반 보병사단


으로 후방을 지키다가 2차대전이후 해체되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창설시 주력이 된 부대는 502 공수보병 연대였습니다. 327, 401 글라이더 보병연대가


후에 합류되었습니다.(라이언일병구하기에보면 중간에

글라이더부대 어쩌구나오는데 그게401글라이더부대라고합니다..) .


377,321,907포병연대가 사단의 포대로 합류되었습니다 .


참고로BOB의 506연대는 1943년에합류되었습니다..

(이들을 위한 막사는 1942년부터 짓기 시작함....)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유럽본토의 상륙을 위해

미본토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4년에 영국으로


훈련장소를 옮기었습니다.



D-day



유타비치에 상륙예정인 제 4 보병사단 을 지원하기 위해서, 적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이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독일군 포병부대를 와해시키위해서

후방에 공수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2편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1944년 6월 5일, 오후10:15분 6,600명의 제 101공수사단 병력들은 1,432대의 C-47수송기를 탑승하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머지않아 유타비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적의 맹렬한 대공포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적의 포화때문에 대부분의 비행기가 원래 목표지점을 찾기가

어려워 원 목표지점에서 벗어난 지점


에서 대부분의 병력들이 낙하를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여, 조종사들


은 더욱더 목표지점을 찾는게 어려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발대가 1시간전에 미리 낙하를 했지만 제시간


에 맞추어서 낙하지점을 지상에 표시하는 임무에 실패를 했습니다.

이날 지상에 착륙한 공수부대원들중에

약 1,500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략 60%의 장비들이


늪에 빠지거나 적의 수중에 들어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악조건하에서도 지상에 무사히 착륙


한 병력들은 각자의 지휘관을 찾아서 부대를 재정비하였습니다.

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의 낙하지점이

뒤엉켜서 제대로 부대를 정비하기 어려워, 짬뽕사단(?)으로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적의 포진지를 급습하거나,

참호를 파서 노르망디를 상륙한후 전방에서 전진


해오고 있는 제 4 보병사단과의 조우를 기다렸습니다.



Carentan

유타비치에서 고전분투끝에 상륙에 성공한 제 4 보병 사단과

그날 오후에 조우를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날밤 유타비치와 인근지역이 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병력들은 참호를 파고 다음날 있을 또다른

전투를 위해 그날 밤을 참호에서 보냈습니다.

다음날 101공수사단은 또 다른 명령을 하달받았습니다.


오마하비치와 유타비치 사이에 위치한 Caraten(카라텐)

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상륙병력중에 오마하비치에 상륙하던 병력들이

가장 치열한 저항을 받은데다가 병력의 피해가 막심하였고,

인근에는 독일군의 정예보병사단인SS사단와기타등등..의사단이 진주해있었습니다.

오마하비치로 적의 증원병력이 증파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Caraten 을 공격하는 것이 101공수사단의 새로운 임무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의 최정예 팬져기갑사단과 독일공수사단등이


지원군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Caraten 을 점령하여 이들의 지원경로를 차단하는


게 시급했습니다. 1944년 6월 8일 이른아침에

Caraten 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영화에는 안나오지만 당시 오마하비치에 상륙했던

병력중의 하나인 제 29 보병 사단 이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했었는데, 101공수사단의 카라텐 점령으로

오마하비치에 상륙한 병력들이 조금씩


전진할수 있었고, 101 공수사단의 활약으로 제 29 보병사단도

포위망을 풀고 역습에 가담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Caraten 은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만약 101공수사단의 카라텡 공격이 무산되었다면,

상륙작전에 참가한 병력들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을 것이고,

증원된 독일군 기갑,보병사단들에 의해 연합군의 진격에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Caraten 을 되찾기 위해 독일군은 팬져기갑사단과

최정예 독일공수사단을 동원해서 역습을 시도하고,


보병으로만 구성되어 대전차 전력이 약했던

101공수사단이 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때마침 제3 보병 사단과 82 공수사단의 기갑전력을

지원해주던 제2기갑사단의 신속한 기동지원으로


위기를 막을수 있었습니다.



(미군이 샤먼탱크를 이끌고 독일전차를 격퇴시키는모습



6월14일에야 비로서 유타와 오마하비치 모두 미군이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었습니다.

101공수사단병력중 502연대는 82공수사단과 제4 보병사단과 전선을 형성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재빠르게 인접부대와전선을 형성하고, 형성된 전선을 조금씩 밀고 올라가는 방식의

전쟁이 보편적이었습니다.

현대전같이 헬기


나 차량이 보편화되어 신속한 기동성을 제공할수 없기 때문에,

인접부대와의 전선구축은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보병사단으로 전선을 구축하고 기갑부대로 지원을 하는 방식의 전선형 전투에 익숙한


세계최강의 미육군이 월남전에서 맥을 못쓴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였기 때문입니다. )

327 글라이더 보병연대는 오마하비치에 있던 제29 보병사단,

제 1보병사단과 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제1공수사단은 약 3주간의 걸친 소규모 전투끝에

북부프랑스 인접지역까지 진군하였습니다.



operation Market -Garden


.

승승장구한 연합군의 사기는 드높아져서, 그해 크리스마스 이전에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할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적에 대한 정찰등을 게을리 한것도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한 요인중의 하나였습니다.

101공수사단은 영국 공수사단Red Devils 과 함께 네덜란드의

안트워프항을 점령하기 위해 적진에 투하되고,

전진해오는 아군의 지상병력을 조우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Market -Garden작전을 설명하려면 너무많은 페이지를 사용하므로 Market -Garden
는 다음에 더자세히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Bulge Battle

1944년 12월 16일, 패퇴하기만 하던 독일군이 아르덴에 대규모 역습을 감행했고,

이로인해 연합군전선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인해 101공수사단은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바스통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101공수사단은 머지않아 독일군 5개 사단 규모의 병력에 의해 포위를 당했고,

항복을 종용받았으나, 끝내 항복을 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을 했습니다.

마침내 패튼 장군 휘하의 제 4 기갑 사단이 101공수사단을 구하기 위해 진격해왔고


이를 이어 제3 보병사단이 증원병력으로 증파되어 왔고,

이들과 함께 독일군에게 역습을 가했습니다.


바스통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임무로 미육군에서 유일하게

101공수사단에게 최강의 육군사단이라는 칭호와 함께

'Distinguished Unit Citation' 이라는 기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보병사단들과 함께 전선을 구축하여,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대규모 작전은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대규모 독일군 병력이 항복을 하였고,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독일로 진격을 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샴페인



2차대전중 최종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1945년 5월1일~8일까지

Berchtesgaden에 위치한 히틀러의 별장을 기습하는 임무였습니다.

101공수사단은 제 3 보병사단과 함께 Berchtesgaden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여기서 독일군 SS사단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현재의 101 공정사단

* 101공수사단은 한국전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 월남전등의 전쟁에서 미군의 신속


기동 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재는 101 공수사단 (101st AirBorne Division)에서 101공정사단


(101st Heliborne division)으로 명칭과 임무가 변경되었고

공수투하가 아닌 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기동부대로변경되었습니다.

506연대 1대대는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어 주한미군으로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3. 발지 전투

히틀러...최후의도박을하다...

히틀러의 최후의 도박이라고 일컬어지는 발지전투는 히틀러가 아르덴느산림지대의

130Km에 걸친 전선에 연합군을기습 성공시키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전선에서는 살을 베는듯한 추위와 고요하였는데 여기서 독일군과미군은

두달 가까이나 대치를 계속해 왔는데도 불구하고도 서로 도발적인

군사행동을 회피『독일군은 이미사기가떨어졌기 때문이라생각이됩니다.』하려 했습니다.

이 전선에는 미8군단이 배치되어있었는데, 2개사단은 전투후 사상자와 기타설비의 손상이 심했고

나머지 2개사단은 모두가 신병으로 편성돼 전투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수송중인 타이거탱크와3호돌격포]

히틀러는 여기에 집중적으로 공격 을 가하고 돌파구를 열어 뮤즈강까지 신속히 전진한다면

그 여세를 몰아 독일 기갑사단을동원해 단숨에 안트와프 까지 전진해 연합군을 보급로 를 차단시켜

비록 패배 하더라도 제1차세계대전의 베르사유조약처럼 불리한조건 보다는 휴전을 얻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히틀러는 생각했습니다. 사실이 작전은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5년동안이나 전세계의 반을 상대로 싸워 온

히틀러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물의는 아니였다고 생각이듭니다..




[아르덴느전선의 파슈름야거 병사]

전투준비

1944년 12월 16일 아침 5시30분에 독일은 공습이시작되었습니다. 히틀러가 이 작전의 성공의열쇠 인 기갑사단의 돌진이

아르덴느숲의 거대한 악천후 때문에 저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예상과달리 이러한

독일군의 엄청난 계획에 놀라지 않은 미군 지휘관은 없었다.

12월 16일~17일에 미 제8군단은 눈이 쌓인 전나무 숲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25만명의

독일군 정예부대의 전진을 필사적 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이때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아이젠하워를 포함해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지휘관들중에서 홀로 의욕에 넘치는 자신감을 갖고 고대하던 대격전을 치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 지휘관이있었으니 이는 조지패튼장군이었습니다..



운영자 보충설명

[조지패튼(1885~1945) 1차대전당시경험을살려서 전차전에눈을떴습니다.

2차대전때는 북아프라카 이탈리아를거쳐 프랑스북부까지 거침없고 과감한

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똥고집(?)무대포 불같은성격 때문에 많은비난을받았습니다..

결국 제3군사령과직을 박탈당하고1945년 교통사고 사망하였습니다.]



이러한 긴급상황에서 상급 사령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고 패튼은 생각했습니다.

패튼의 자신감에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강력한 반격을 해주기를 바라면 6개사단으로 작전을 실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패튼이 장담한대로 쉬운일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선 진행중인 자아르 전투(제3군이 자아르 전투에있었습니다.) 를 중지하고

전군을 90도 선회 시켜 독일군의 저항을 막아야되였고, 게다가 몇천대이상의 차량을 눈길 속에서 이동시켜야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행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부터 무리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는 지휘관들이많았습니다.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에 넘치는 패튼이었다.



[아르덴느전선의 파슈름야거들]

반격

12월22일 패튼은 3개사단으로 공격을 시작한 다음날 날씨가 좋아져 공군이 지원을 할수 있게 되었다.

바스통 에서는 독일군이 포위되어있는 연합군을 섬멸하기 위해  병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했습니다.

그는 제4기갑사단에게 아론뤼에쥬가도 를 따라 바스통까지 진격하는것을 최우선으로 중시한다고 결정했다.

이 전투에 의해 "발지전투" 에서의 패튼은 유례없는 명성을 떨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패튼의결정이야 말로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패튼의 전임참모장 가페장군이 이끄는 역전의 용사 제4기갑사단은 고속전투여단에게 바스통의 외각진지의 독일군 초계선을 돌파하도록 했습니다.

이들이 상대할 독일제5파슈름야거 (Fanschirm Jager) 는 독일 공군의 지상요원(신병)을 끌어모은 오합지졸같은 전력이었지만 대전차포를 앞세우고

미 제4기갑사단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파슈름야거소속 MP40돌격병]

운영자보충설명

강하엽병단인 파슈름야거 (Fanschirm Jager)는 공군소속(미군의 공수사단은 육군소속)이었으며

초기에는 최강의 전력이었으나, 전쟁말기에는 보충할 신병이 적어지자, 정비병 행정병 등을

포함한 공군지원 병력으로 지상전투임무를 수행시키다보니 오합지졸의 부대로 전락되었습니다.


바스통구출작전

미 제8군단의 건조물 파괴공작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수행되었는데

이것이 구원부대의 전진에도 방해만 되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23일 정오에 바스통에 남쪽 14Km가까이 쯤에 있는 부르논 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군이 주춤거리고 말았습니다. 24일 지상포격과 전투기의 지원이 있은 뒤 오후1시 30분 전차로 보병을 후송하여

공격했으나 날씨가 맑아 얼어 붙었던 땅이 진창으로 바뀌어 전차의 기동에 제한을 받게 되었고 이는 독일 88mm포 등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습니다.

그결과 11대의 셔먼전차가 격파 당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후속 고속기동연대에 바톤을 넘겼졌습니다.

4개대대의 포병과 1개대대 의 셔먼전차가 맹렬한 포화를 뿜으며 루모아 빌의 제5파슈름야거 를 격파하고

독일군 250명이상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날 하루를 루모아빌에 공격에 다써버려 이 이상은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바스토뉴까지는 아직도 10Km가 남아 있었고 미제4기갑사단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파슈름야거병사]

재공격은 패튼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길고도 고난의 전투였습니다.

드디어 12월26일 오후4시 제101공수사단을 독일군에게 구출한 바스통 구출작전 이 끝나는 동시에

조지 패튼은 그의 이름은 전 미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패튼의 제3군을 자아르강의 교두보에서 눈 덮인 아르덴느 로 이동시켰습니다.

다시말해 추운겨울의 유럽땅에서 3만3천여대의 차량을 연 25만Km나 이동시키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던것 패튼의 특유의 대담함 실행력과 지휘력

무엇보다도 똥고집(?)으로 군수송면으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수송면의 한 공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미9군 종군기자였던

로버트 멜리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덴느의전투가 패튼 덕에 이겼다고 믿고 있다. 확실히 제3군은 바스토뉴를 탈환했다.

하나 독일군의 주력부대가 최초의 열흘동안 벨기에 북서부에 미 제1군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바스통 주변에서 격전이 전개된것은 도시가 독일군에 포위 되었을때가 아니고 열흘뒤 브르논 과 안트와프를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히틀러가 버리고 남쪽으로 군을 돌렸을때 생겼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멜리엄



확실히 패튼이 북진중에 싸운 독일군은 제7군의 2류전력인 보병 4개사단으로

명백하게 진격을 " 지연만을"시키기 위해서만 배치 되어있던 것이 였습니다.

이 동안에도 북부방면에서 미제1군이 독일군 정예부대인

제5, 6기갑군등 4개군단의 중앙쪽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하나 패튼의 견제작전이 없었다면 사실 제1군은 극히

위험한 전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바스통 구출작전 은 적의 측면을 찌르는 패튼 작전의 목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4. 노르망디 상륙작전.

아이젠하워 장군의 노르망디 상륙일 연설

연합군 육해공장병들은 1944년 6월 드디어 기다리던 D-day의 날이다가왔습니다

아래글은 당시 아이젠하워 장군의 연설문입니다.


General Eisenhower's D-day Speech (June 6, 1944)



Soldiers, Sailors and Airmen of the Allied Expeditionary Forces:You are about to embark upon the Great Crusade,

toward which we have striven these many months.The eyes of the world are upon you.

The hopes and prayers of liberty-loving people everywhere march with you.

In company with our brave Allies and brothers-in-arms on

other Fronts you will bring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German war machine,

the elimination of Nazi tyranny over oppressed peoples of Europe, and security for ourselves in a free world.


Your task will not be an easy one. Your enemy is well trained,

well equipped and battle-hardened. He will fight savagely.


But this is the year 1944! Much has happened since the Nazi triumphs of 1940~41.

The United Nations have inflicted upon the Germans great defeats,

in open battle, man-to-man. Our air offensive has seriously reduced their

strength in the air and their capacity to wage war on the ground.

Our Home Fronts have given us an overwhelming superiority in weapons and munitions of war,

and placed at our disposal great reserves of trained fighting men. The tide has

turned! The free men of the world are marching together to victory!


I have full confidence in your courage, devotion to duty and

skill in battle. We will accept nothing less than full victory!

Good Luck! And let us all beseech the blessing of Almighty God upon this great and noble undertaking.


-Eisenhower, Dwight David



[아이젠하워장군이 연설후 장변들과이야기를하고있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노르망디 상륙일 연설(1944년 6월6일)


연합 원정군의 육해공군 장병 여러분:여러분들은 바야흐로 위대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려 하고 있다.

여러 달 동안 우리는 이 과업을 준비하기 위해 땀흘렸다.

지금 세계의 시선은 여러분들에게 쏠려 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그들의 희망과 기도는 여러분들과 함께 진군할 것 이다.

다른 전선의 전우 및 동맹군과 함께 여러분들은 독일 전쟁기구를 파 괴해야 하며 유럽인들을

억압하고 있는 나치 전제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하고 자유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여러분들의 임무는 결코 쉽지 않다. 여러분들의 적은 잘 훈련되어 있고

잘 무장되었으며 전투경험으로 단련되어 있다. 적은 처절하게 대항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1944년이다. 1940~41년의 나치 승전 이후 많은 일들이 일 어났다.

연합국들은 수많은 회전과 백병전에서 독일을 대패시켰다.

우리의 항공전술에 의해 그들의 항공전력과 지상에서의 전쟁수행능력은 크게 약화 되었다.

우리의 조국 후방전선은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우세한 무기와 탄약 을 제공하고 있으며

훈련된 대 예비 전투병력을 준비해두고 있다. 대세는 바뀌었다!

세계의 자유민들도 승리를 향해서 함께 진군하고 있다!


나는 여러 분들의 용기, 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역량에 무한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완전한 승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행운을 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고귀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바이다.
-아이젠하워



[골드해변 1급비밀지도]



[소드해변 1급비밀지도]

지상최대의작전

오마하 해변에서 주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동안 2 레이져 대대의 세개 중대(D,E,F)는

서쪽으로 3마일 떨어진 곳에서 타 부대와는 연계되지 않은 독자적인 작전행동을 하게 되었다.  

레인져 부대의 임시 지휘관인 제임스 E 러더 중령이 지휘하는 약 200 명의 병력들이 Pointe du Hoc으로 향했다.

그들의 주요 목적인 그 요새화된 지역을 점령하고 상륙정들의 집결지점에서부터 해변에 이르는

전 오마하 비치에 접근하는 경로에 사격을 가할 수 있는 6문의 155mm 곡사포가 있는 포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이 임무는 특별한 곤란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Pointe du Hoc의 해변은 85-100 피트 높이의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약 25 야드 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레인져 대원들은 유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영국 해협에 있는 절벽에서 수개월동안 이를 연습해왔었다.

영국 코만도 부대의 경헙(디에프 해안 상륙시 이들은 노르망디에서의 레인져 부대의 임무와 동일한 절벽 위에 있는 해안포를 무력화시키는 것)

으로 인한 결과로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위한 특수 장비들을 개발해왔다.

10 대의 상룩정 각각은 길이가 (각 쌍으로)3/4인치인 평범한 로프와 감는 로프, 줄 사다리를 절벽위에 늘어세울

이들 끝에 달린 갈고리를 발사하는 세쌍의 로케트 발사기를 갖추고 있었고.

이에 더해서 이들 상륙정 각각은 한쌍의 소형의 휴대용 로켓발사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해변으로 운반되어 작은 로프를 쏘아올릴 수 있게 했다.

상륙정 각각은 또한 빠른 집결에 적합하도록 가볍고 (연결해 쓸수 있도록) 4 피트 길이으로 만들어진  만들어진 관모양의

강철제로 된 고가 사다리를 갖추고 있었다.


4대의 DUKW(도날드 덕이라 불리는 수륙양용수송차량)는 100 피트 길이의 소방서용의 고가사다리 하나를 장비하고 있었다.

공격조 개인은 최소 장비를 갖주었고. 중화기는 각 중대당 4대의 BAR 분대 지원 화기와 60mm 벅격포 2문을 장비하였다.

2대의 보급 상륙정이 이들 중대를 위해 나머지 장비와 전투식량, 폭파장비와 여분의 탄약등을 수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공격계획은 H 시에  E와 F 중대는 Pointe  du Hoc 의 동쪽 측면에서 D중대는 서쪽에서 상륙하는 것이 었다.

불행하게도  방향을 잘못잡은 단 하나의 사고가  레인져 대원들을 농락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바꾸기 위해 현재점에서 목표지점을 향해

다시 접근해야 했으며 거의 옆으로 보이는 해변과 (측면을 노출한채)평행하게 가야했다.

그 절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적의 거점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며 그 소선단은 약 40분 후에 도달했다.

이러한 지연으로 인해 해변에서 떨어진 해상에서 공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레인져 부대의 다른 8개 중대

(2레인져 대대의 A,B 중대와 5 레인져 대대 전 중대(6개 중대 편성))는 Pointe du Hoc 으로 이들을 후속하지 않고 Vierville로 가야 했다.)

침몰그리고...

상륙정 한대가 수송지점으로 향한지 얼마안되 곧 침몰했다.

보급 보트 중 한 대는 (방향 전환을 하여 원래 수소지점으로 향하기)시작한지 15분 후에 침몰하였고.

다른 한대는 계속 떠있게 하기 위해 선상에 있는 모든 개인 장구류들을 버렸다.

한 DUKW가  Pointe  du Hoc 근처에 있는 절벽에 있는 진지로 부터 20mm 포사격을 받아 침몰했다.

나머지 9대의 살아남은 상륙정들은 목표지점의 동쪽 측사면, 약 400 야드 폭 정면을 향해 갔다.

함포사격은 H 시 이후 계속되었고 적은 이에 회복하여 절벽위에 있는 참호로 병력을 투입할 시간을 가졌다.

구축함 Satterlee 호가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발견해 가지고 있는 전화력을 동원하여 그 절벽 정상을 쓸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군데 점점이 존재하는 소구경 화포와 측면에서 계속되는 기관총 사격이

그 상륙정들 주변을 때리고 있었고 레인저 대원들이  매우 많은  탄공이 생긴 폭이 좁은 해변에 상륙하기 전까지  25명의 사상자를 내게했다.






[당시 사용된TNT]

저항과공격

목표지점에 도달하자 곧 로켓이 발사되었다.

물을 잔뜩 먹은 로프들중 몇개는 절벽에 걸리지 않았으나  

절벽 가장자리에 적어도 한개의 쇠갈고리도 올리지 못한 것은 단 한 척의 상륙정 뿐이었다.

하나 혹은 두가지 경우에 분해 가능한 고가 사다리가 사용되었다.

DUKW가 왔지만, 탄공이 생긴 해변을 건너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해변 끝에서

그들의 고가사다리는 절벽의 정상까지 닿지 않았다.




[그당시 독일군 저격수들]

절벽 끝에 독일군이 나타나서 바로 밑에 있는 레인져 대원들을 소총 사격과 수류탄으로 괴롭혔다.

이런 적의 저항은 곧 잠잠해 졌는데 (BAR 사수가 자신을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주의를 떼놓았고,

Satterlee 호가 가까운 거리로 접근해와 전화력으로 수분동안 집중사격을 가해 절벽을 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어오르는 일은 지체되지 않았다. 목표지점에 도달 후 5분도 안되어 최초의 레인져 대원들이

하나의 혹은 다른 형태의 로프에 의지해 절벽 정상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들중 몇 명은

해변에 있는 깊이 패인 탄공에 따져 진흙을 뒤집어 쓰게 되어 오르는데 곤란함을 겪었다.

몇개의 로프가 적에 의해 잘리거나 고정시킨 곳에서 흘러 떨어졌다.

최초로 올라간 병력들은 3명이나 네명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사전에 정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포진지를 향해 이동했다.

그들은 모든 이정표가 사라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어떤 사람도 없는 땅에 자신들이 있고

그곳은 매우 심한 포격으로 인해 생긴 많은 탄공에 의해 만약 병력들이 15 피트 정도 간격으로 떨어져 있게 되면

그들 서로의  접촉이 두절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소수의 적만이 보였을 뿐이어서 이들은 깊게 파진

개인호와 포대들이 연결된 폐허가 된 참호망을 통해 급속히 전진해겼다.

차례차례로 그 작은 진격조는 지정된 포대에 도착했으나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았다.


세곳의 포대 진지들은 부분적으로 파괴어 있었다. 그곳의 포는 이미 제거 되어있었다.



"Pointe du Hoc 에 대한 임무는 완수되었음."

머뭇거림없이  그 레인저 대원들은 자신들의 다음 임무를 위해 내륙지방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다음임무는 해안고속도로에 도착해 방어진지를 설치해 Vierville 와 Gandcamp 사이의

주요 루트를 차단하며 오마하 해변에세 올 제 116(제29 보병사단)보병연대전투단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오진 8시경에 좀더 서쪽에서 F중대 소속의 12명의 대원들이 같은 시간에 그 아스팔트 도로로 와서 합류했다.

이(임시편성) 부대는 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야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Grandcamp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하는 지점에

한 그룹을 투입했다. 이러한 재빠른 진격을 하는 동한 몇몇 소수의 적 집단과 교전을 벌여 손실을 내며 이들을 격퇴시켰다.


정찰활동이 즉시 시작되었다. 약 오전9시30분경 두 레인져 대원들이 주 도로에서 200 이터 떨어져있는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버려진 5문의 포가 있는 포대를 발견했다. 아주 잘 위장된 그것들은

유타와 오마하 해안 두곳 모두 포격을 가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큰 탄약창고가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 안이나 근처에는 어떠한 적도 없었다.



그 정찰병들은 소이 수류탄으로 그것들 중 2개 포를 못 쓰게 만들었고 더 많은 수류탄을 가져 오기 위해 돌아갔다.

그들이 없는 동안 두번째 정찰병들이 못쓰게 된 포들에 대해 마루리를 지었고 화약에 불을 놓았다.

그래서  주요 목표를 달성했다는 전문이 Pointe  du Hoc 로 보내졌다.

Pointe  du Hoc와 그 근방에 있는 적들이 혼란에서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었다.

그 요새화된 지역(Pointe  du Hoc )의 동쪽에 있는 해변에서 일어난 손실중 대부분을 발생시켰던 한 기관총진지가 F중대

소속의 약간의 병력에 의해 공격받았다. 그들은 그것에 도달할 수 없어서 그 진지는 아침 늦은 시각에 있었던

함포사격에 의해 절벽 끝 전부가 바다 속으로 날려버려 질때까지 계속해서 활동하며 남아있었다.

Pointe  du Hoc 서쪽의 절벽 끝 근방에 위치한 한 대공포대가  사격을 가하며 Pointe du Hoc 지역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잔당소탕

오전 7시 40분을 전후해서 모든 레인저 보트 팀이 올라왔고.

늦게온 병력 들중 12명이 내륙으로 가는 대열에서 벗어나 이 대공포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보내졌다.

그들은 탄공들을 지나가며 이를 향해 공격해들어 갈때. 포격과 박격포 사격이

그들의 공격을 돈좌시켰고. 그 공격부대는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몇분후에 터널과 근처 참호에서 나타난 독일군들이 반격을 가해와 한 사람을 제외한 그들 모두를 제압해 생포해 버렸다.

그곳의 지형이 포격에 의해 매우 찟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로 부터 단지 100 야드 밖에 떨어져 잇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탄공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휘부 조차도 그 생존자가 돌아와서 보고할때까지는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12명의 소총수화  하나의 박격포 분대로 구성된 또 한번의 공격이 급히 개시되었다.

그들은 그 거점의 반까지 가서 포격에 의해 그곳에 못 박이게 되었고 그 공격조의 거의 모든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그날의 나머지 기간동안 Pointe du Hoc의 소규모 부대는 포위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요새화된 지역에서는 적 저격수들이 등장했고. 몇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많은 진지 안에 숨어 있는 적들을 완전히 소탕할 수 없었다.

독일군 병력의 3/4는 아직도 여전히 Pointe du Hoc 의 끝에 있는 피해를 입지 않은 콘크리트로된 관측소 안에서 자신의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그 오후동안 StPierre-du-Mont 방향에서 있는 두 번의 적의 반격은 레인져 부대에 남아있던 박격포의 정확하고

재빠른 사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앞서의 대공포진지는 여전히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구축함의 포격은 거기에 닿을 수 없었다. 고속도로에 있는 진격조와의 통신은 간간히 두절되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주로 그들이 때때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교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Pointe du Hoc 의 지휘소는 주요 해변(유타, 오마하)을 공격하고 있는 부대와의 연락은 취할 수 없었지만

신호등과 통신기를 통해 함정과는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제 1 해군 해안 사격 통제반은 Satterlee호로 오전 7시28분에 일찍이 이들과의 통신을 확립할 수 있었다.

Saeerlee 호는 디데이의 나머지 시간 동안 내내 바다에 머물며 아주 유용한 포격지원을 제공했다.

오후에 Pointe du Hoc 부터의 한 전문이 해군을 거쳐 5군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 Pointe du Hoc 에 대한 임무는 완수되었음. 탄약과 지원군이 필요함, 많은 사상자가 발생."

러더 중령의 부대가 디데이에 받은 단 하나의 전문은 " 이것(이 소식)은 사령부의 많은 의심과 걱정을 해소시켜주었다."  

이작전으로 인하여 종전을 5년더빨리끝낼 수 있다고 많은사람들이 입모아 말한다..

필자역시 그렇게생각한다.. 하지만.이작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5. 스탈린 그라드

1.스탈린그라드는 포기한다.

스탈린그라드가 아직 포위되어 있을때부터 시작입니다.

1942년 크리스마스,노보체르카스크의 독일군사령부에서 지도앞에 모여 있는 폰 만슈타인 원수와 참모들은 매우 침울해 있었다.

소련군최고사령부가 단지 스탈린그라드의 일개군전멸이 아닌 A집단군,B집단군,돈집단군으로 이루어진

100만명에 달하는 독일남부군전체의 전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머리속은 이제부터 소련군의 대공세를 어떻게 막을 수 있으며

돈강과 도네츠강사이의 공백을 메울수 있는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소련의 제24전차군은 이탈리아 8군의 저항을 가볍게 뚫고 계속 전진하여

12월 23일에는 스탈린그라드에 보급및 비행전진 기지역활을 하는 타친스카야를 앞에 두고 있었다.

도망치기 바쁜 이탈리아전선을 5일만에 150마일이나 돌파하였던 것이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니 독일놈들이 방심하는 틈을 노리자.공격은 크리스마스자정이다."
이 계획은 대성공이었다..제 13항공함대는 그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스탈린그라드전선의 지원을 위해 주요물자를 소개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단지 88밀리포1문,20밀리대공포 6문 이 전부 인 이 사단은 1개 전차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다행히도 보유하고 있던 귀중한 180기중 대부분이 이륙하여 124기가 다른 비행장에 안착했다.

호트의 스탈린그라드 구원군을 지원하는 요충지인 치르의 배후가 위험해졌고

소련 제 1방면군의 선봉인 바다노프가 남부군의 목줄을 조이고 있었다.

타친스카야에서 로스토프까지의 80마일을 돌파하여

코카서스의 A집단군의과 연결되는 고리를 끊는다면

제 4기갑군을 포함한 80만명이 포위에 갖히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만슈타인이 믿을만한 것은 자신의 경험과 호트,홀리트,프레터-피코와 같은 맹장들이었다

타친스카야를 구하기 위하여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를 구원할 마지막 전력이자

가장 정예인 호트의 제 6기갑사단을 이동시켰다.

바다노프에게 일격을 가하지 않고서는 호트의 상황도 위험하게 된다.

제 15기갑연대는 겨우 25대의 장갑차량밖에는 없었으나

장갑척탄병,돌격공병,대전차포등을 동원하여 65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하였고

제 336보병사단은 5일간 92대의 전차를 격파하였다.

이성공덕분으로 만슈타인은 제1기갑사단을 밤새 이동시켜 제 6기갑사단과 함께 바다노프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제6기갑사단의 선두파견대가 타친스카야의 북부지역을 탈환함으로써

바다노프의 기갑군은 오히려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고 당황한 바투틴은 자신이 가진 2개의 기계화군단과 2개의 저격사단을 증파했으나

소련군역시 스탈린그라드에 대부분의 전력이 묶인 탓에 예비병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련 제 24전차군단은 불타는 타친스카야에서 전멸하고 만다.

바투틴이 독일군을 흉내내시도해본 전격전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전략에서는 독일전차지휘관을 당해낼수 없다고 해도 분명 소련군은 달라졌다.

기동력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배후를 포위된 후에도 끝까지 저항을 했다.

그러나 아직은 값비싼 수어이 몇번 더 남아 있게 된다.
12월 31일 소련 제 25전차군단이 이탈리아 8군의 가벼운 저항을 오판하고 정찰대의 파견도 없이 무모하게 진격하게 된다.

그들은 홀리트파견군의 배후를 치기 위하여 비스트라야강을 건너려 했으나

독일제6기갑사단의 초소가 이들의 움직임을 먼저 포착했다.

리우스장군은 즉시 야간 전투를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대전차로를 배치하였다.

제 25전차군단은 대전차포와 중장갑차량의 포격을 받고도 계속 무모하게 전차를 밀어넣었다.

T34의 장갑을 믿고 독일전차와 충돌하여 나아가려 했지만 4호전차도 우수한 기동력을 과시했다.
소련전차병의 미숙함은 차분한 독일전차지휘관을 당해내지 못했다.

전날밤 비스트라야강을 건넜던 90대의 전차는 모두 격파당했고 25전차군단은 전멸했다.

제 6기갑사단은 23대의 장갑차량이 파손되었으나 대부분 회수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돈집단군 북쪽소련기갑군의 공세가 실패함에 따라 로스토프에 대한 위협은 일단 사라졌다.

소련 제 6군및 제 1방면군의 진격 역시 프레터-피코 파견군이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제 7기갑사단과 제 19기갑사단의 반격으로 무려 20배나 많은 적을 막아낸 것이다.



2.로스토프로 누가 먼저

한 편 돈강과 마이어스강사이에 있는 호트제 4기갑군은 계속 위험한 상태에 있었으나  

제 5SS뷔킹사단은 이동중에 있었고 히틀러는 엘리스타에 위치하고 있었던 제 16장갑척탄병사단의 지원을 여전히 거부했다.

호트는 공세에 나선 소련군을 최대한 괴롭히며 전선을 잘 지탱해 주었다.

12월말 일선지휘관들의 계속된 요청에 설득당한 히틀러는 결국 코카서스지역에서의 철군을 승인하였다.
이순간 홀리트와 호트사이의 넓은 공백을 노리고 옐레멘코의 제2방면군과 제 51군이 로스토프로 진격했다.

전세계의 이목이 스탈린그라드로 집중되어 있을 때 약3배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폰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소련군이 차단하기 전에 앞서 로스토프로 입성해야 했다.
1943년 1월 17일 한 참모가 만슈타인의 방에 뛰어 들었다.
"각하,소련전차들이 돈강을 건넜습니다.코사크부대는 전멸했고 우리까지 35키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슈타인은 혼란을 극히 싫어하는 냉철한 전략가였다.

"이근처를 돌아보면 수리중인 전차들이 있을 걸세.

굴러갈수 있는 것은 전부 끌고 나가 소련전차들을 박살내!.

필요없는 사령부병사들도 데리고 나가!.우리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

왜 이순간 옐레멘코는 전차들이 로스토프로 맹진격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옐레멘코가 전차군단을 로스토프로 우겨 넣었다면 남부군은 동강이 나 동부전선은 더 일찍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바다노프의 제24전차군단의 망령이 계속 따라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스탈린 그라드 역전의 용사인 말리노브스키의 전차군단과 같은 타격대도 이제 완전히 지쳐 버렸다.

보급선은 연장되었고 그 막강한 전투력도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말리노브스키,옐레멘코 심지어 후루시초프까지도 이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모스크바의 스탈린만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모든것을 사수하라는 편집증 환자였다면 스탈린은 재빨리 배후를 끊어 대군을 일거에 섬며하려는 조급증환자였다.

비록 증세는 히틀러가 더 심했지만 .
"제 2방면군은 7일 저녁까지 도네츠강에 도달한다.제 3전차군은 돈강의 서쪽을 도강하고 제 98저격사단은 그 침투점을 넓힌다.제 2방면 기계화군단은......"

이것이 모스크바의 대답이었다.

"진격한다,진격할뿐이야!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적은 루마니아나 이탈리아군이 아닌 독일군이란 말이야!"
명령만으로 전투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20일이 되어서야 옐레멘코의 선봉대가 마니치강을 건너 바타이스크를 향해 진격했다.

8대의 T34,3대의 T70,9대의 장갑차에 나눠탄 200명 이 전부인 파견대는 기습에 성공하고 이 뒤를 제 51군이 따랐다.

독일은 3개군이 단절될 위험에 처했다.겨우 30키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엘리스타에서 철수하고 있는 제 16기계화보병사단의 제 116전차대대와 제 503티이거대대로 도강을 저지해야 했다.

수개월간 이사단은 제1기갑군과 제 4기갑군간의 300키로의 공백을 훌륭히 지켜내 역전의 사단이었다.

그러나 소련 제28군은 제 16기계화보병사단을 앞지르게 되었고 동시에 포틀레타르스카야와 살스크사이를 제 51군이 공격을 하였다.

제 2방면군은 북쪽에서 스포르니이를 향해 진격하여 소련 코카서스전선과 연결될 계획이었다.

독일A집단군을 쪼개어 제 1기갑군이 로스토프로 향하지 못하게 막고 제 17기갑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3.남부군의 위기

제 16기계화사단의 게하르트 쿤트 슈베린 소장에게는 용기뿐 아니라 운도 있었다.

그는 소련군의 역습계획과 지도를 가진 소련의 참모장교를 생포하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스포르니이이로 향했다.

소련의 게라시멘코장군은 계획대로 진행을 하였으나 슈베린이라는 변수를 모르고 있었다.모사는 제천이라고 했던가.

1월 15일 오전 게하르트태프의 전차중대는 북서쪽에서 소련의 전략요충지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강을 건넌 소련군의 배후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들은 소련군이 점령한 마을로 진격하였다.

1대의 T34와 4대의 76.2미리 대전차포를 격파하였고 뒤늦게 달려온 1대의 T34를 더 격파했다.

좌익에서는 쿤의 제 3중대와 한스분젤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분젤의 3호전차는 대전차포를 차례로 없애 가며 스포르니이이댐까지 진격했다.

그는 1942년에도 이장소를 공격한 적이 있었으나 간발의 차이로 댐이 폭파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남쪽에서는 클라피히중위가 사모두로브카를 공격하였다.

여기는 소련 제2자동차화 저격여단이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또 한차례 귀중한 정보를 얻어 냈다.

포로가 된 여단의 참모에게서 마니치스카야에 위치한 소련군이 23일 공격을 개시하여

기습으로 바타이스크다리를 점령할 것이라는 귀중한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클라피히중위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모두로브카를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마을을 사수할 경우 소련 교두보의 측면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로트미스트로프는 이 마을을 그냥두고 갈 수 없었고

결국에는 클라피히와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클라피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이 덕분에 만슈타인의 제11기갑사단과 제16기계화병사단은 마니치스카야의 소련군에게

역습을 가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월 22일 발크장군의 제 11기갑사단이 돈강을 건너 로스토프로 이동하였다.발크의 선봉대가 예고로프 대령의 선발대를 공격했다.

예고로프는 5대의 T34와 T70을 잃고 후퇴하였다.소련 선발대가 붕괴된 것이다.

23일 제 11기갑사단은 요충지인 마니치스카야를 공격했다.


슈베린은 제116전차대대와 제 156기계화보병연대로 이곳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마을 은 전차들 이 잘 엄폐되어 있었고 곳곳에 대전차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심해! 대전차 장애물이다." 대대장의 이어폰이 울렸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전차호에 빠져 대전차포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2대의 4호전차로 20여대의 엄폐된 T34전차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테페의 전차가 파괴되고 기터만의 전차도 불타 올랐다.발크는 적을 속이기로 결정했다.

25일 오전 가능한 모든화력을 북쪽에 집중시켰고 정찰차량과 보병수송차량의 기관총에 일부러 예광탄을 사용하여 이곳으로 적의 주의를 끌었다.

소련 여단장은 이 유인에 속아 엄폐된 전차들을 북쪽으로 황급이 이동시켰다.

이 순간 발크는 모든 화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며 "전차 앞으로!" 를 외쳤다.

소련전차의 배후를 제 3대대,제 15전차연대가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독일군의 피해는 1명사망에 14명의 부상자 인 반면에 소련군은 마니히스카야에서만 20대의 전차와 600명이상의병력을 잃었다.
다음날 로트미츠로프장군은 제 2방면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지금당장은 더이상의 작전수행이 불가능함』

소련군 역시 전력이 크게 감소하였다.

제 5기계화 군단은 2200명,7대의 전차,7문의 대전차포로 줄어들었고

제 2방면군전체는 단지 29대의 전차와 11문의 대전차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로써 로스토프에서 코카서스통로는 유지되었고

테레크에서 돈강으로 후퇴한 제1기갑군이 투입되었다

5.제 2차하르코프공방전

드디어 하르코프지역에 대한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만슈타인 휘하에 들어가지 않은 란츠파견군에 하르코프를 사수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적2개군에게 포위된 하르코프를 사수하라는 희망없는 임무는 폴 하우저 장군이 맡게 되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하르코프사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습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슈타인으 해임시까지 계속되는 전략가의 논리와 히틀러의 편집증의 대결이 시작되었으나

오히려 히틀러는 최정예 제 1SS[아돌프히틀러]사단과

2SS[다스라이히]사단까지 하르코프에 투입시켰다.

폴 하우저 장군은 상식적이고 전략적 기술이 있으며

상관에 맞서는(?)배짱이 있는 군인으로 스탈린그라드의 바보들과는 달랐다.ㅡㅡ;

2월 14일 포위망은 완성되었고 소련군 전차들이 도시외곽방어망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시내에서는 시민군이 봉기를 시작했으나 모든 병력은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시내 곳곳에서 독일 후방에 대한 공격이 거세어졌다.

약속했던 제320보병사단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마자막 예비병력까지 투입한 하우저는 란츠에게 후퇴를 요청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란츠는 사수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오까지 후퇴허가를 내주기 바람.하우저"
"총통의 명령에 따라 기갑군은 현 위치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사수한다.란츠"
"포위망을 피하고 물자를 구하기 위해 ,13시 우디지역외곽으로 후퇴한다는 명령을 내릴 것임"

15일 저녁 소련군의 시내진입이 다스라이히 사단의 전차파견대에 의해 무산되었지만 더 이상 버틸수는 없었다.

하우저는 또 다른 스탈린 그라드를 피하기 위해 총통의 명령을 무시하고 남서쪽으로 돌파를 감행했다.

전차가 척탄병의 전방을 청소하고 야포,대공포,돌격공병들이 측면을 엄호했다.

24시간이후 국방군의 최정예 [그로스 도이칠란드]사단이

소련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빨치산이 내건 븕은 기가 펄럭이는 광장을 거쳐 불타는 하르코프를 탈출했다.


히틀러는 광분하였으나 하우저는 만슈타인에게 귀중한 최정예3개 기갑사단을 안겨주었고

하르코프의 함락은 스탈린의 착각을 더욱 굳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탈린의 생각에 하르코프의 승리는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히틀러가 이렇게 쉽게 물러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없는 것이니 남은 것은 단 하나,

독일군이 정말로 붕괴되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러한 소련수뇌부의 오판은 소련군의 각전선에 그대로 미쳤다.

2개저격군단,2개전차군단,1개기계화군단으로 구성된

소련 제6군의 선봉대 전차150대가 드니에프르강을 향해 진격했고

좌익에서는 4개전차군단,2개독립기갑군여단,3개저격사단,1개스키여단으로

구성된 포포프의 기갑군이 홀리트파견군의 배후인 아조프해를 향해 진격해 나아갔다.

"최고의 행운이군,아주 잘 되었어."


만슈타인은 크레믈린의 성급한 진격을 보고받고 참모들에게 빙긋이 웃었다.

2월 17일 당황한 히틀러가 만슈타인에게 직접 날아왔다.

만슈타인은 침착하게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미우스강은 어떠한가?"


"홀리트파견군은 미우스강에 걸쳐 전선을 구축하고 소련3개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으니 첫 단추부터 스탈린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소련 제 4기계화 군단은 미우스강 중앙을 건넜으나  

제 16기계화보병사단과 제 23기갑사단의 역습으로 마트예베프와 쿠르강남부에서 포위되어 참모전체가 포로가 되었다.

미우스강의 방어선만이 버텨주고 있었다.

홀리트파견군의 측면에서는 제1기갑군이 [뷔킹]장갑척탄병사단과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제기억으로는 아마 5SS였을 겁니다.)

함께 소련제 1방면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제 1기갑군과 란츠파견군과는 넓은 공백이 존재하였고

이 빈곳으로 포포프의 기갑군집단이 밀려들고 있었다.

포포프는 145대의 T-34를 선봉대로 진격시키고

267대의 각종전차를 결정타를 날리기 위한 예비병력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포포프의 공격은 어떻게 할 셈인가?"


"포포프의 기갑군은 잘 막아내고 있으나 소련 제6군이 밀려들 파블로그라드지역이 문제입니다.

하우저가 후퇴시킨 기갑군을 제가 사용할 수있게 해주십시오."


"안돼,그 부대는 하르코프 탈환전에 사용한다.애 있지도 않은 소련공격을 걱정하나!하르코프가 중요해!"

그러나 바로 다음날 소련의 제 6군이 진격하여 드니에프르강40마일까지 와있다는 보고를 받게 된 히틀러는  

하르코프로의 진격을 위해 숨겨놓았던

제3SS[토텐코프]사단까지 만슈타인 휘하로 인정하게 된다.

이보다 한 술 더떠 6개군을 방어하고 있는 허약한 미우스전선에서 가능한 모든 기갑사단을

북서쪽전투에 투입시키는 것도 승인하였다.

이미 소련 25전차군단이 홀리트파견군의 보급로를 끊어 놓았고

이제 히틀러와 소련 제 6군의 선봉대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남아 있지 않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소련 전차가 10키로앞까지 진격했을 때 불안해진

총통은 만슈타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황급히 떠났다.

만슈타인원수는 이제 성가신 간섭없이 마음대로 반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6.제 6군의 원수를 갚자.

다행스럽게도 충분히 보충된 제 15보병사단이 프랑스에서 9일전에 도착해 있었다.

악천후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령관을 대신하여 빌레머 중령은

"제 15보병사단이 탄 기차는 도착하는 대로 시넬니코보로 향한다."라는 명령을 내린다.
현상황에 대하여 가차안에서 브리핑이 이루어졌고 기차에 탄 그대로 역에 돌진한 제 88척탄병연대의

3개 중대는 잠자리에 있는 소련군들을 포로로 잡고 방어망을 구축했다.

추가병력과 대형화기를 실은 두번째 열차가 도착했다.

격심한 야간 전투를 벌인 끝에 이 마을을 탈환한 88연대는 적의 전차에 맞서 사수했다.

드니에프르강에 이르는 마지막 방어선을 지켜낸 것이었다.


시넬니코보로부터 77마일 동쪽의 크라스노아르메이스코예를

점령한 포포프의 기갑군집단은 도네츠강의 산업지역을 위협하였다.

[노틀란트],[게르마니아],[베스트란트]의 척탄병여단이

포포프의 선봉대를 봉쇄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 위험한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뷔킹사단의 포병연대였다.

이 포병연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자신들보다 우월한 독일전력을

상대하고 있다고 믿은 포포프는 더이상 남서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을 주저했다.

소련의 초기 공세를 막아낸 이제 만슈타인이 걱정한 위험한 상황은 이제 끝났다.

이제 도네츠와 드니에프르강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게 된다.

전사한 소련 제 663대공포부대는 연대소속의대위에게서 나온 독일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는 소련군이 현재상황을 모르고 얼마나 맹목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급이 되지 않고 있다.탄약,음식은 물론 한 방울의 보드카도 일선에

도착하지 않고 있다.보드카는 패주하는 독일군을 추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뷔킹사단이 소련제4전차군단의 진출을 막고 제3기갑군,제7기갑사단등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발크의 제11기갑사단이 포포프의 보급을 끊었으나

소련군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독일군 추격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독일측은 소련의 각종전신을 해독하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군은 제공권을 빼았긴 탓에 일선의 보고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기갑군의 이동도 남부집단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정도였으니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었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진흙길은 다시 얼어붙었고

이제 독일군의 최대장기인 전격전이 시작될 차례였다.

보급이 안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기갑여단의 처리는

제333보병사단에 맡기고 각 기갑사단은 계속 이동하여

포포프의 기갑군집단을 케이크자르듯 잘라나갔다.


이제 포포프는 바투틴장군에게 후퇴를 애원했으나 바투틴의 대답은 단호했다.


"공격하라.적은 퇴각하고 있다.드니에프르로 도망가게 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멈추고 있는 것은 싸울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포포프를 제외한 모든 소련군 수뇌부가 승리에 눈이 멀어 있을 때,

만슈타인은 드니에프르강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호트장군에게

소련 제 6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트는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제 3개 군단을

소련 카리토노프장군의 제6군을 협공하기 위하여 이동시켰다.

북서쪽에서는 하우저 장군의 SS기갑군이,남서쪽에서는

제 28기갑군이 협공을 가해 파블로그라드에서 랑데뷰를 하도록 되어있었다.

전투는 1943년 2월 19일부터 시작되었다.

하우저의 SS장갑척탄병사단은 제6군의 측면을 깊숙히 파고들었고

제 4습격항공단의 슈투카들이 이들을 엄호하였다.

카리토노브의 3방위군단이 물러났고 15저격군단이 분산되었다.

파블로그라드의 철도중심은 독일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노벨스도르프의 제28기갑군역시 파블로그라드에 파고들어

우수한 장비를 갖춘 소련 제 25기갑군단은 고립되고 말았다.

소련군은 계속 위험한 상황을 알렸으나 소련수뇌부는

독일정예사단들의 진격을 여전히 후퇴로써 착각할 뿐이었다.

이로써 가장 위험했던 적의 진격은 무산되었다.

체스게임에서와 같이 만슈타인은 자신의 말들을 우왕좌왕하는 적들사이로 움직였다.

포포프와 제6군에대한 공격을 위하여 분산시켰던 병력을 한데모아 도네츠강으로 진격시켰다.

몇대의 전차만이 남은 포포프의 군단은 북으로 후퇴하기 위하여 바투틴에게 애원을 했다.


하지만..


"모든것을 동원하여 적을 섬멸하라.그렇지 않으면 당신 혼자의 책임이다."

정말 어이없는 답변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2월 24일 바투틴은 포포프와 제 6군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 더 이상의 작전을 중지하고 하르코프와 미우스지역에 대한 공세를 부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독일제20기갑군이 포포프와 제1방면군의 마지막 거점을 청소하고 있었고

베를린 제 3기갑사단은 도네츠강서쪽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바투틴의 군대중 가장 강력했던 포포프기갑군은 전멸했다.

21일 간의 전투동안 포포프기갑군은

251대의 전차 ,125문의 대전차포,73문의 중포,

425대의 트럭,3000명의 전사자를 남겼다.


구원에 나선 제3전차군역시 제 4습격 항공단의 슈투카등에 의해 공격직전에 격멸되고 만다.

호트의 기갑군은 후퇴하는 소련 패잔병들을 청소하였다.

6개전차군단,10개의 저격사단,6개의 독립여단이 전멸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고

총615대의 전차,400문의 야포,600문의 대전차포가 격파되었고

23000명이 전사했고 100000명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독일군역시 포위망을 갖출 전력이 부족하였고

추운 날씨로 밤에는 마을에 머무른 덕분에 많은

소련군이 포위망을 탈출하고 포로는 6000명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만슈타인의 전략적 개가였다.

이로써 독일군의 전략적인 개가였다.

이로써 동부전선은 스탈린그라드 이전의 상황인 원점으로 돌아갔고

소련수뇌부에는 이악몽이 계속 따라다니게 된다.




7.제3차하르코프공방전

이제 남은 목표는 하르코프였다.

2월이후에는 동장군 못지않은 진흙장군이

찾아와 모든 이동을 중지시키는 것이 예사였으나

하늘은 이번에는 독일의 편을 들었다.

겨울이 계속된 것이다.

만슈타인은 하르코프를 향해 진격했다

.소련은 제 3전차군에서 2개전차군단과

3개저격사단을 빼내 하르코프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소련군은 제1SS사단의 방어선과 SS기갑군의 진격로사이에

뛰어들어 무장친위대의 최정예3개사단의 포위망에 갇혀 전멸하고 만다.


하르코프남부에서는 샤파렌코중장의 제25방면저격사단이

제 28기갑군에 대항하여 5일간 버텨주었으나

소련 제 3전차군의 붕괴와 함께 장애물이

사라진 SS기갑군은 서쪽에서 포위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제 3차하르코프공방전이 펼쳐지게 된다.

3월 10일 토텐코프와 아돌프히틀러사단이 북쪽에서 진입하기 시작했고

제 3대대,제 2SS장갑척탄병연대는 격렬한 시가전끝에 븕은 광장을 장악해 도심으로의 진입로를 텃다.

히틀러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4주전에 포기했던 하우저는 이를 단 6일만에 탈환하고 만다.


하우저가 무모한 명령에 대항하여 구해냈던

SS패잔병들은 드니에프르강의 전격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하르코프에 다시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에 하우저는 너무 빨리 도심에 진입하여

시가전을 벌였기에 피해도 컸고

많은 소련군들이 탈출할 수 있게 했다는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8.소련군 4개군이 전멸  

소련군 사령부에는 한결같이 예비사단을 요청하는 전화가 계속 울려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카투코프의 제 1방몀군과 제 21군을 전선으로 투입한 바투틴은

제 3전차군에게 하르코프를 탈출하도록 명령을 하고 눈을 감고 싶었다.


6군은 전투불능,포포프의 기갑군은 전멸,

제 3전차군은 명목상의 사단이 되었고,제 69군도 전투불능에 빠졌다.


믿을 수없는 일이었다.거의 4개군이 괴멸되었다.

수십개의 사단과 여단은 어디로 패주했는지확인되지도 않고 있고

무려 52개사단과 여단이 사령부의 지도상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독일군들이 계속 북진을 한다면 벨고로드와 쿠르스크는

함락될 것이며 중앙전선군집단의 5개군이 오히려 고립되고 말 것이었다.


스탈린은 무려 600마일떨어진

슈밀로프의 제 64군을 하르코프구원군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은 스탈린그라드의 영웅이었지만 바로 다른 전투에 투입되기에는 힘든 사정이었다.


"제340저격사단의 사정은 어떤가?"


"12000명중 275명뿐입니다.사령관동지."


"기갑여단은?"


"단 한대의 전차도 없습니다.사령관동지."


이것이 바로 진격하는 SS기갑군과 라우스의 군단을 막아야 하는

제69군의 사정이었다.

3월18일 그로스 도이칠란드사단은

보로소브카를,SS기갑군은 밸고로드를 함락시켰다

.진흙장군이 오기전에 드니에프르강을 건너야 한다던

소련군이 이제는 진흙장군이 하루빨리 강림하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쿠르스크지역의 6개군을 협공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락 요청했다.

그러나 중앙집단군의 폰크루거는 단호하게 지원을 거절했고

드디어 진흙장군이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결국

제4기갑군과 켐프파견군을 동원한 협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히틀러가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군은 절대절명의 순간을 모면하게 되었고

독일군은 중앙집단군과 다시 연결되어 도네츠강지역의 석탄은 다시 독일 산업지대로 보내졌다.

남부전선은 다시 원위치되었다.

만슈타인은 천재적인 전략으로 스탈린 그라드의 비극을 갚았으나

이미 이미 히틀러의 돌이킬 수없는 실수가 동부전선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1943년 3월에 협공을 가하였으면 쿠르스크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고

무려 6개군 전멸이라는 대수확을 거둘수도 있었으나 무려 111일 이후에

뒤늦게 쿠르스크작전을 실시함으로 귀중한 예비사단들을 전부 소비하고 만다.


이때의 전력 손실로 만슈타인조차 쿠르스크이후 계속되는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후퇴만을 거듭하게 된다.

또하나의 실수는 만슈타인이 요청했던 드니에프르강서쪽의 방어진지구축을 소흘히 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의 요청을 패배주의적 발상이라고 무시했으나 쿠르스크패전이후 드니에프르강을 간신히 넘은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융단포격에서 숨을 벙커하나 제대로 없는

,마지막 남은 이 천연의 장애물을 너무나도 어이없게 넘겨주고 루마니아까지 계속 후퇴만 하게 된다.....

『여담씨리즈』

"지금우리는 마지막생존자다... 우리는 트레일러에 갇혀 사흘째 굶고있다...
얼마있으면 적이들이닥칠것이다.. 우리는 마지막탄환을 장전하고있다.
내아버지에게 내가 싸우다 장렬히전사했다고 전해달라....
하일히틀러"




6. 타이거 탱크

6호전차 티이거

2차대전에 사용됐던 상당수의 병기는 군사분야에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까지 일상적인 용어로 사용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스핏파이어, 제로, 무스탕등이 대표적인 예로 사람들은 실제로 어떤 비행기인지도 모르면서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전차로서는 미국의 셔먼과 독일의 티이거 2종만이 이런 명성을 얻었고 있습니다.

티이거가 전설적인 전차가 된 것은 적어도 일부는 독일군의 선전에 힘입은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1943년이래로 보여주었던 강력함 때문이었습니다.

44년말까지 티이거는 거의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전선에서 군림했으며

종전때까지도 동등한 조건에서 제대로 맞설수 있는 전차가 연합군측에는 변변히 없었습니다.

티이거는 그야말로 방어력,화력,기동력등 3박자를 갖춘 '전장의 여왕'노릇을 했습니다.

티이거의 개발은 1937년 4호전차가 막 배치되던 당시, 차기 주력전차가

될 30-33톤급의 전차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헨쉘사가 받으면서 시작된었습니다.

이 계획은 DW1 (Durchbruchswagen, 돌격 전차) 이라는 명칭으로 프로토타입 1량이 만들어졌으나

헨쉘사의 모든 역량을 65톤급 VK6501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VK6501은 노이바우파르조이그를 토대로 한 중전차 계획이었지만

프로토타입 2량이 생산된뒤 계획이 취소됐었습니다.

이에 따라 헨쉘사는 다시 DW1 개발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헨쉘사는 DW1의 설계를 발전시킨 DW2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DW2는 승무원 5명의 32톤급으로서

75mm 24구경 전차포와 MG34 기관총 2정을 장비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헨쉘사에게 다시 새로운 전차개발명령이

내려짐으로써 DW2 역시 취소됐었습니다.

새 전차의 명칭은 헨쉘사의 경우 VK3001(H)라고 명명되었으며

기타 다임러-벤츠,포르쉐,만사등에도 개발명령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헨쉘사의 VK3001(H)는 티이거의 직계선조가 되는 차량으로 DW의 맥을 잇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이 차량은 클라이너 티이거(작은 티이거)로 불렸습니다.

차체상부는 독일전차의 전통대로 수직장갑판을 용접해 구성됐으며

차체 상하부는 볼트로 고정되었습니다.

서스펜션은 7개의 토션바, 3개의 리턴롤러로 구성됐었습니다.

이 전차에는 75mm 48구경 고속전차포가 탑재될 예정이었지만

소련의 T-34가 등장함에 따라 더 강력한 화포의 탑재가 요구됐습니다.

이 포로는 T-34의 장갑을 관통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한편 VK3001(H)의 섀시를 이용해 128mm K 61구경

대전차포를 탑재한 차량 2량이 동부전선에 시험적으로 투입돼 좋은 평가를 얻기도 했습니다.

VK3001(H)의 개발과 동시에 히틀러는 어떤 전장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훨씬 중량급의 전차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차는 어떤 적전차도 1,500미터 밖에서 격파할수 있으며, 같은 거리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전차무기에도 방어될 것,

최고시속이 40km에 이를 것등이 요구됐었습니다.

이 전차에 탑재되기로 한 주포는 개래트 725라는 명칭으로 개발중이었는데

텅스텐 탄심의 포탄을 발사하는 75mm 강선포였습니다. 이

에 부응한 헨쉘사의 VK3601(H)는 전면 100mm, 측면/후면 60-80mm에 달하는 대단한 중장갑으로

보호됨으로써 당시의 많은 연합국측 대전차병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수 있었습니다.

VK3601(H)의 섀시는 VK3001(H)의 것으로부터 발전했지만

전륜이 8개로 늘어나고 대형 로드휠이 장착됐으며 리턴롤러는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병기국은 VK3601(H)의 주포가 될 예정이던 개래트 725에

사용될 텅스턴탄심 포탄을 사용하는데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의 개발을 중지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강력한 88mm KwK 36 전차포였습니다.



대공/대전차 겸용의 88mm Flak 18포로부터 발전한

이 주포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보다 대형의 차체가 필요했으므로 헨쉘사는 VK 4501(H)라는 새로운 차체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VK4501(H)는 VK3601(H)를 급히 설계변경한 것이기 때문에 외모나 디자인이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양자간의 주요한 차이는 VK4501(H)의 상부차체가 캐터필러 위까지 돌출하게 된 것인데,

이는 대형의 KwK 36포를 수납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큰 포탑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 상부차체의 측면장갑도 80mm까지 강화됐었습니다.

새로운 45톤급 전차는 헨쉘 이외에도 포르쉐사도

VK4501(P)라는 명칭으로 개발중이었는데

양자에 탑재될 포탑은 라인메탈사가 개발중이었습니다.

라인메탈사는 88mm포 장비형 포탑 이외에도 75mm KwK L/70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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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2차전쟁기념사

2007.02.22 09:28:13

어라 7,8도 있는데 짤렷네...

【D.H.G】

2007.02.22 09:40:14

내용이 많으면 짤립니다 ;; 그런데..... 왜여기에 올리시눈 ?!

풍로

2007.02.22 10:46:08

소오스케님이시죠^^ 걍 심시해서용ㅋㅋ
profile

잘먹고잘살놈

2007.02.22 13:25:59

이런건.....시러어~~~~`(읽기 귀찮아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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